[중국혁명가 열전] 김학철 - 중국혁명과 민족해방의 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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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의
김학철(본명 홍성걸)은 조선족 작가이다. 1916년 원산에서 태어났고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황포 군관학교에서 무장투쟁을 학습했으며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일본군과 전투했다. 팔로군 선전 간사로 활동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노동신문 기자로 일했다. ‘인민군보’ 총편집(편집국장)으로 활약했으나 한국전쟁 때 중국으로 피난했다. 중국 문학가 연맹에서 일하다 연변에 정착해 소설을 썼다. 일생동안 루쉰을 흠모하여 문장이 루쉰 글의 풍격과 닮아 있었다. 그 결과 “조선족의 루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항전별곡’ ‘최후의 분대장’ 등이 있다. 문화혁명기에 마오쩌둥 우상화를 비판한 소설 ‘20세기 신화’를 썼다가 비판을 받고 1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었다.
위 소개는 중국의 기록이다. 그 밖에도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의 기록에는 그가 보성고보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지만 훗날 명예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재학 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상해에서 의열단에 포섭된 김학철은 윤세주의 지도아래 반일 지하 테러활동에 종사했다. 곧이어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한 그는 루쉰을 흠모하여 친구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용기부족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1937년 21세가 된 그는 조직의 방침에 따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황포군관학교는 본래 광저우에 있었는데 호북성 강릉에 위치한 분교에 입학한 것이다. 교장은 김두봉으로 훗날 북한에서 숙청을 당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이때 김학철은 윤세주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김학철은 평생 견결한 사회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1938년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무한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했다. 조선의용대 결성대회에는 팔로군 판사처 책임자인 주은래와 유명 작가 곽말약도 참석하여 격려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항일 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당군이나 팔로군 같았으면 중위, 대위, 소령 등으로 고속승진을 하였겠지만(이때 초급 장교들의 전사율이 너무 높아 황포 출신 중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10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단련된 혁명가들이 모인 조선 의용대는 숫자가 얼마되지 않아 정예 중의 정예였다. 조선 의용대는 팔로군에 소속되어 전투보다는 주로 선전활동에 복무했다. 담벼락 같은 곳에 항일 구호를 쓴다던가 대치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일어로 선무활동을 하는 등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조선 사람은 일본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팔로군에서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하북성에 위치한 호가장 전투에서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석가장에서 심문을 받은 후 북경,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전쟁포로가 아닌 치안유지법으로 재판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전향을 거부한 그는 총상 치료를 받지 못해 3년 6개월 후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목발을 짚은 외다리로 일생을 살아야 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그는 10월 9일이 되어서야 정치범 석방으로 풀려났다. 서울로 귀국한 그는 그해 11월부터 조선독립동맹 서울시 위원으로 좌익 정치활동을 하며 작가수업에 매진했다. 이때의 심정을 “총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펜을 잡는다.”고 썼다. 이때 소설가 이무영이 그의 문학스승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46년까지 그는 ‘균열’ ‘남강도구’ ‘아아 호가장’ ‘담뱃국’등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했으나 미군정의 좌익탄압으로 부득이 월북해야 하였다. 북한에서 그는 로동신문사 기자, 인민군 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학철은 그해 10월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1951년에 그는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 정령)에서 연구원으로 창작활동에 매진했다. 1952년 연변자치주 주장(주석)이던 주덕해의 초청을 받아 연변으로 간 그는 이때부터 연변에 거주하게 된다. 중국에서 반우파 투쟁에 걸려든 김학철은 1957년 반동분자로 지목받아 숙청을 당했다. 이때부터 24년간 그는 당적은 물론 문필활동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1967년에는 더욱 가혹한 시련이 닥쳐 그는 반혁명 분자가 되어 징역 10년 형에 처해졌다. 개인숭배, 대약진 운동을 비판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홍위병들의 가택수색에서 발각된 것이다.
1977년 만기 출옥한 김학철은 그 후에도 반혁명 전과자로 실업 상태에 놓여 공장에 나가 일하는 아내의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80년 복권된 그는 24년 만에 창작활동을 시작하여 맹렬하게 소설 집필을 해나갔다. 그의 나이 64세였으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1989년 73세가 된 그는 중국 공산당 당적을 회복하여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자이자 당원으로 살았다. 2001년 85세가 된 김학철은 신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자 병원 입원과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체는 화장하여 두만강에 뿌려졌으며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보냈다.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김학철의 고향 가족, 친우에게 보내드림‘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김학철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굽히지 않는 비판정신과 견결한 사회주의를 체화한 투사이자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물론 한국에 그의 많은 작품이 출판되어 있으며 중국 소수민족문학관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군 창설 기념 단체(사진: 보리 제공, 세계일보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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