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1회~20회차까지 연재 모음 (홍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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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철학]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
[순서]
1. 위기의 시대와 변증법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27
2. 변증법은 ‘정-반-합’이 아니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33
3. 자명한 제일원리는 없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38
4.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은 상대적이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53
5. 변증법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69
6. 변증법은 구체적이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89
7.“운동의 결과이자 동시에 출발점인 인간 주체”
☞https://napo.jinbo.net/v2/archives/9222
8. 관념변증법과 유물변증법
☞https://napo.jinbo.net/v2/archives/9239
9. 토대 결정력과 상부구조의 적극성
☞https://napo.jinbo.net/v2/archives/9257
10.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사유방식
☞https://napo.jinbo.net/v2/archives/9276
11. 개념의 운동과 동일성 사유비판
☞https://napo.jinbo.net/v2/archives/9296
12. 내제적 비판의 효능과 한계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00
13. 역사적 사유방식과 진리의 시간적 핵심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13
14. 직접성과 매개의 변증법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35
15. 칸트의 이율배반과 변증법적 모순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59
16. 모순과 차이의 형이상학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74
17.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81
18. 주요모순과 전략적 사유
☞https://napo.jinbo.net/v2/archives/9398
19. 현단계 주요모순과 노동자 정치운동
☞https://napo.jinbo.net/v2/archives/9420
20. 현상과 본질 그리고 과잉결정
☞https://napo.jinbo.net/v2/archives/9462
1. 위기시대와 변증법
1. 위기의 시대가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임금은 제자리인데 매일 치솟는 물가와 이자 폭탄으로 잠을 설치는 노동자민중에게 경제전문가들은 한동안 어금니 꽉 깨문 채 버텨보시라는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부동산폭탄 신용폭탄이 곧 크게 터진다는 이야기도 그냥 유언비어는 아닌 듯하다. 흔히 떠도는 ‘양털깎기’라는 말은 흡혈귀들이나 좋아할 기만적인 표현이다. 털 좀 깎인다고 아프지는 않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은 평소에도 고혈을 빨려 왔지만, 주기적 경제위기 때마다 뼈와 살을 떼어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로써 유서 깊은 경제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은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경제위기가 직접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일상을 옥죄고 있다면, 전쟁의 파괴력은 차원을 달리한다. 러-우전쟁은 끊임없이 인명을 살상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여 이미 천만이 넘는 난민을 만들어냈다. 핵전쟁이나 생화학전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인류문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오늘날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치부될 수 없다. 환경재앙은 또 어떤가. 지구의 총체적 오염과 온난화 혹은 대규모 식량난만 밀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2, 제3의 후쿠시마가 다시는 어디서도 터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 마당에 핵발전을 더 늘이겠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린가.
게다가 한국 사회 기득권층의 총궐기로 집권한 극우세력은 ‘노동자 없는 세상’, 즉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국가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주무르고 있다. 법을 앞세운 이들의 파쇼폭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갈아 넣으며 자본독재에 복무한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이들의 굴종에는 한계가 없다. 이들이 미-일에 바치는 이권과 국민적 자존심의 대가로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될수록 전쟁위기는 고조될 것이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문제에 부딪칠 때 우리는 해결을 위해 그 원인을 찾는다. 원인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해결책이나 해결의 수준도 달라진다. 문제 해결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거리로 쏟아져나와 윤석렬 탄핵⋅퇴진⋅타도를 외치고 있다. 오늘의 경제위기⋅전쟁위험⋅환경재앙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폭증시키며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현정권에 나라를 맡겨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오만함과 뻔뻔함, 대책 없는 무능, 반복적 외교 참사, 민주주의 파괴 등을 감안하면, 언제 타도되든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아쉬움도 남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정권이 교체되어 이른바 ‘친노동’ ‘진보’ ‘좌파’라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오늘의 위기가 해소될까? 아마 대놓고 노조 사무실을 털거나 없는 죄를 덮어씌워 정적을 제거할 만큼 눈치 없는 짓을 벌이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굴욕외교를 답습하지 않으려 무슨 일이라도 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남북긴장을 완화하고, 미-일-중-러 등과의 균형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 전쟁위험을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획기적으로 줄여놓을지도 모른다. 기본소득이나 기본대출 등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팍팍한 삶을 조금은 견딜 만하게 바꿔놓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오늘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제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두 산업국들이 성장률 둔화⋅정체의 늪에 빠진지는 오래 되었다. 공황은 꾼준히 반복되고 있다. 한국도 성장률 둔화나 주기적 공황에서 벗어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기업들이 목을 매고 추진하는 생산성 증대는 노동력 절약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본독재 하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자유시간 확대가 아니라 대량해고와 절대빈곤의 양산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다. 거대 독점자본들과 결합한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에 저렴한 원료⋅노동력⋅지대, 그리고 시장과 영향력 등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과 투쟁은 경제전쟁의 수준을 넘어서 언제라도 무력 분쟁과 대량살상전으로까지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핵재앙을 포함한 전지구적 환경재앙 역시 어느 민주정권이 들어서도 해결사 역할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자본증식의 원리를 절대자로 신봉하는 한 그렇다.
3. 물론 정권교체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탄압을 대놓고 노동개혁이라고 우기는 정권을 용납하고 묵인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윤리적 타락의 한 극단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권교체에 머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촛불의 에너지로 탄생한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개혁의 열망을 깔아뭉개고 기득권세력과 한 몸이 되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G7이 어쩌고 선진국이 저쩌고 했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온갖 차별과 위계는 고스란히 남은 채 고착되었고, OECD 최고의 산재사망률과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노동후진국의 늪은 변함없이 노동자민중의 삶을 결정했다. 이제 도약을 위한 근본적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발상 전환의 첫걸음은 자본증식의 원리를 고정불변의 절대자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경제활동의 목적을 이윤추구라고 보는 자본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문제를 냉정히 직시하는 것이다. 냉정히 돌아볼 때 지금의 무도한 정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민주주의가 언제 실질적으로 구현된 적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란 본질적으로 국민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입법⋅사법⋅행정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입장과 권익을 대변하는지 따지면, 눈을 씻고 찾아도 답을 얻을 수 없다. 노동자정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현실적으로 존재감조차 없다. 이처럼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정치권력에서 배제되고 있는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속임수인가. 단순명료하게 그런 나라는 극소수 자본가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자본독재 국가라고 칭해야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해 발을 뗄 수 있지 않겠는가. ‘삼성공화국’은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닌 것이다.
제대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자본독재로부터 노동자민중이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국가, 즉 노동자국가로 질적 전환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전환 없이 어떻게 인류공멸도 불사하는 자본독재 권력의 무한증식⋅착취⋅독식 욕구를 합리적으로 제어하고, 인류가 이룩해낸 찬란한 생산력을 공존과 공영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겠는가. 대량실업⋅대량살상전⋅환경재앙의 위기를 불러내며 공멸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독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이성적 존재들은 근본적 전환을 통해 대안사회로 나아갈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 필요성이 현실성은 아니다. 자본독재를 넘어서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본은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임금인상 요구를 상대로도 무자비한 전쟁을 벌인다.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자본독재를 넘어서자는 제안은 그래도 상당히 이성적이므로 환영할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움직임이 눈에 띄면 그 싹부터 자르려 들 것이다. 자본독재의 극복은 특히 자본독재로 고통을 겪고 자본의 출발부터 종말까지 자본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자민중의 지난한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극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식하며 범인류적 파멸을 초래하기 위한 패권전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고 누리기 위한 인류사적 해방전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자민중은 매일 매순간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느라, 또 자본독재 하의 총체적 지배장치들에 얽매여 정작 의식적으로 해방전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저주들도 그러한 지배장치의 한 부분이다. 노동자⋅노동자계급⋅노동자정치⋅노동자국가 등을 금기어로 묻어 버린 학교⋅언론⋅문화물 전체가 자본독재의 지배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이로써 규정되는 주체적 조건도 위기의 주요 요소다. 노동자민중의 삶 속에 스며든 평등 감각의 상실, 위계질서에 대한 무비판적 순응, 고립분산과 각자도생의 체질화 등이 자본독재가 그동안 거둔 성과물들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자정치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남의 일로 보는 오늘의 일상적 풍경을 불변의 자연조건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자본독재가 경제성장을 무기 삼아 주도해온 계급전쟁의 중간결산물이자, 해방전쟁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다.
성공적인 인류사적 해방전쟁을 통해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건설하게 될 대안사회는 그 누구도 사회구성원들 위에서 멋대로 갑질할 수 없는 평등사회가 될 것이다. 또 누구라도 소외된 노동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류가 이룩해낸 무궁무진한 문화유산과 자연의 혜택을 공유하고 누리며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생산력은 이미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는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국가 건설은 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 관문이다. 노동자정치운동의 당면과제는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 자본독재권력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의 의지와 지혜를 효과적으로 모으는 것이다.
5. 자본독재로 인한 오늘의 위기를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기회로 전환하는 데에는 변증법적 사유방법이 필수무기가 될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방법을 통해 우리는 현존 지배질서를 절대화하자는 유혹을 경계할 수 있다. 자본독재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는 오기도 기를 수 있다. 만물의 변화를 당연시하면서 자본독재가 만들어놓은 지배장치와 그 부산물들만은 영구불변의 천륜처럼 떠받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떨쳐버릴 길 없는 본성처럼 우리의 사고방식과 감각과 욕구 혹은 무의식과 초자아에 달라붙어 있는 습관들에 대해서도 그 형성의 조건을 따지고 변화가능성을 타진하며 해방전쟁의 주요 전쟁터로 바꿔놓는 데에는 변증법적 감각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지배적 고정관념이나 사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당면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근본적 해답을 찾아가는 실천적 사유의 노동이야말로 변증법의 요체라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방법의 훈련 없이는 노동자정치의 성공도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도 요원할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변화와 함께 현실을 파악하는 사유방법의 변화에도 주목한다. 양 측면을 결합하여,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맑스)이라는 점에서, 헤겔을 건너뛰고 변증법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관념론적으로 ‘신비화된 껍질’까지 삼킬 이유는 없다. 오히려 헤겔에게서 ‘합리적 알맹이’를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그 세포단위에서부터 총체적 발전과정과 귀결에 이르기까지 들춰내는 맑스의 유물변증법에 주목하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일 것이다. 사실 ????자본론????은 유물변증법의 현장이다. 그래서 레닌은 헤겔의 논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실은 레닌의 저술들 전체가 또한 유물변증법의 현장이며, 자본독재와의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무기고이기도 하다.
이들 위대한 변증법 이론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또 필요하면 아도르노⋅루카치⋅마오쩌둥⋅지젝 등의 조언도 참조하고, 가끔은 알튀세르나 들뢰즈 등의 성가신 훼방에도 대응하면서 인류사적 해방전쟁의 전쟁터 한 모퉁이에 뛰어들고자 한다. 함께할 전사들도 없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우리의 전투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미리 예단하기 어렵다. 독재자들도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시대니 변증법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자. 그러나 방향을 잃지는 말자. 우리의 일차목적지는 노동자국가이며, 최종목적지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다. 물론 평등과 풍요도 자명한 실체가 아니다. 그 의미에 대한 시비도 소홀히 하지 말자. 변증법은 목적의식 앞에서도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2023. 3. 13.)
2. 변증법은 ‘정-반-합’이 아니다
1.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변증법의 한 가지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맑스는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합리적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지 및 그 이론적 대변인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안겨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 내지 ‘일시적 측면’을 파악하며,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가 계절 변화나 자본독재 하의 형식적 정권교체 따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불변의 자연상태로 전제하는 것과 달리, 맑스는 그것의 ‘일시적 측면’을 직시함으로써 인류사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론적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맑스의 이러한 전제 전환은 알튀세르가 청년기 맑스의 주요 저술들을 과학의 영역에서 몰아낼 심보로 써먹은 ‘인식론적 단절’ 따위의 구호로 퇴색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인류사적 전제 전환’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맑스가 헤겔로부터 받아들인 ‘합리적 형태의 변증법’을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어쩌면 당연해 보일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 생존투쟁과 욕망회로에 갇혀 있는 한 대개 현존하는 자본독재를 불멸의 질서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 따위는 꿈도 꾸지 않기 때문이다. 현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아직도 상식적 기대치를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지지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개혁 즉 노동탄압이다. 그만큼 노동자민중에 대한 자본독재의 분할통치 전략이 악성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즉 노동자민중 자신이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양산 등을 통해 고착된 불평등과 서열구조를 체질화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제도교육과 보수언론 혹은 노동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문화물들만 아니라, 가격으로 차등화된 상품들 자체가 노동자민중의 의식과 감각과 욕구를 불평등의 감옥에 가두고 길들이는 자본독재의 무기다. 서열의 사다리에 매달려 남들보다 한 칸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무의식적 충동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에게, 서열관계를 허물어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말은 ‘멋있기는 하나 현실성 없는’ 남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이처럼 불평등구조에 대한 순응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는 주체적 조건은 자본독재 하의 역사적 산물이지만, 역으로 그런 주체적 조건이 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자본독재도 허물어지기 어렵다.
자본독재를 떠받치고 있는 오늘의 주체적 조건 조성에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죽이고 파묻어온 지적 풍토도 한몫 거들었다. 현실사회주의의 패배 이후 진보 학계 일각에서 총애를 받아온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노골적 반-헤겔주의는 변증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보다 오히려 변증법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청산하는 일에 기여했다. 그 부수효과로는 예비노동자인 학생들에게 헤겔⋅맑스의 원전과 씨름하는 노고를 피하도록 부추긴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반-헤겔주의 유행병이 퍼지기 이전부터도 변증법을 몇 가지 공식으로 묶어 박제화하는 교과서식 논의방식이 이미 변증법의 생명력을 고갈시키기는 했다. 즉 ‘대립물의 통일’, ‘양질전환’, ‘부정의 부정’ 등의 공식을 습득하여 현실 문제들에 적당히 적용할 줄 알면 변증법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태도가 ‘어떤 것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는’ 변증법의 비판적 혁명적 본질을 고사시켜온 것이다. 변증법은 단순한 공식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정-반-합’으로도 요약되지 않는다.
2. 변증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헤겔과 ‘정-반-합’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헤겔 자신은 ‘변증법의 탄생 현장’이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정신현상학????에서 정-반-합이라는 공식을 피했으며, 도식적 형식주의적 사유방법을 신랄하게 야유한다. 그는 형식주의적 사유방법과 관련해, “모든 천상의 것과 현세의 것, 모든 자연적 형태와 정신적 형태들에 몇 가지 보편적 도식의 규정들을 갖다 붙이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는 이 방법이 산출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조직에 대한 뻔한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 그는 그러한 방법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을 생략하거나 감춰버린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헤겔은 그러한 방법을 “써먹기 손쉬운 것인 만큼이나 금방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이 알려지면 그것을 반복하는 일은 이미 들통 난 마술을 반복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물론 현실의 복잡하고 풍부한 문제들을 고정된 몇 가지 도식에 맞춰 단순히 파악하는 태도는 맑스나 레닌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과 ‘일시적 측면’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도식이나 공식들의 불변적 타당성을 고집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짓 아니겠는가. 엥겔스는 궁극적인 과학에 도달했다고 자랑하는 뒤링을 무자비하게 조롱하며 변증법적 인식의 무한한 과정적 성격을 강조한다.
도식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인식의 과정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일정한 고정성을 지니는 추상적 개념들을 모두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때그때의 개별적 인상이나 직접적 경험에만 의존해서는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사물들의 변화를 일일이 따라가며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헤겔은 이처럼 “우연적 속성들이나 술어들을 계속 따라다니는”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표상적 사유의 본성’이라고 규정한다. 또 그는 본질을 구분하고 추상하는 오성의 활동, 즉 개념적 사유를 “가장 경탄할만하고 가장 위대한, 또는 절대적인 권능의 힘이자 노동”이라고 평가한다. 맑스 역시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 그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시적 측면’ 및 ‘불가피한 파멸’을 논증하는 데에 활용하는 추상적 인간노동, 가치, 잉여가치, 가변자본, 불변자본, 잉여가치율, 이윤율, 유기적 구성 증대, 물신주의, 전형, 평균이윤율 저하 경향, 과잉생산과 공황 등등의 핵심어들은 자본주의 경제영역의 표면에서 누구나 직접 직관할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라, 개념적 추상과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질적 문제들이다. 이 점에서 추상과 개념을 통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갈 중요성을 예컨대 ‘경험주의’라고 비하하고 직관이나 ‘징후독해’ 따위를 추켜세우는 반-헤겔주의 인식론들의 효능에는 심각한 문제가 따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협소한 도식주의만 아니라 끝없는 표상적 사유의 늪을 피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때 추상과 개념은 필수적인 무기다. 그러나 개념이 사태와 거리가 먼 도식으로 굳어질 위험도 인정하며, 따라서 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필수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변증법에 대한 아도르노의 규정은 참조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개념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를 통해 개념질서를 수정해가는” 사유방법이다. 또 그것은 “사유방법이지만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방법의 단순한 자의를 극복하고 개념 속에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선적인 것은 ‘대상들의 존재’ 혹은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이다. 반면에 사유⋅개념⋅개념질서⋅사유방법 등은 대상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대상에 근거해 수정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수정의 가능성 및 필요성을 전제할 때, 어떤 개별 인식이든 고정불변의 절대 진리로 확정될 수 없고, 더 나은 인식으로 나아가는 부단한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경우 비판적 혁명적 사유에 대한 제약으로 기능하는 직접적 검열이나 이해관계만 아니라, 사유방법 내지 사유도구 자체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을 끌어들여 ‘대상에 다가갈 자유’를 강조한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개념틀에 의지하지 않고는 사고하지 못하는 정신박약 상태를 극복하는 것도 변증법적 사유의 자유에 필요한 것이다.
3. 대상들의 ‘살아 있는 본질’에 자유로이 다가가는 변증법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가동할 경우, 기존의 어떤 지식이든 정보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자본독재가 무한반복으로 주입하는 고정관념들, 예컨대 ‘경쟁력을 갖추어야 살아남는다’, ‘남보다 한발 앞서가야 잘 살 수 있다’, ‘이웃과 동료들은 경쟁상대 혹은 적이다’, ‘평등은 인간의 본성과 어긋난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등등 삭막하고 살벌한 교리들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 지배적 본질을 비판하며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이론들에 대해서도 한줄 한줄 그 현실적 타당성을 검증하면서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를 총체적으로 밝혀내는 점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결함 없는 절대적 진리들만으로 완결된 것은 아니며, 오늘의 조건에 근거해 새로이 채워야 할 공백과 수많은 논쟁점들을 포함한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자본독재를 극복해가는 인류사적 전쟁을 의식적으로 벌이는 전사들이라면 우선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든 각자의 위치에서 전쟁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 전투방식일지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는 주체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어떤 권위에 의존해 누가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은 금물이다. 반대로 대상의 ‘살아 있는 본질’을 놓고 계급장 뗀 채 논쟁하는 민주적 운동문화는 필수다.
과학적 인식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에 맞서 랑시에르는 ‘감각의 재분할’을 정치구호로 내세운다.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사회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경험에 근거해 감각의 변화 쪽에 강세를 옮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독재권력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현재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조건을 바꾸는 과정에서 인식이 우선이냐 감각이 더 급하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툴 일은 아니다. 사고방식과 감각만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과 초자아 등도 모두 전쟁터다. 그리고 어디서 시작되든 이 주체적 요인들의 변화는 모두 자본독재의 극복과정에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미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삶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우리는 멋있는 것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한다. 따라서 무엇을 멋있다고 느끼느냐 하는 미감의 문제는 결정적으로 정치적이다. 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욕구 문제와 직결되며, 여기서 행동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자본독재를 극복하는 데에는, 그 극복의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인식과 함께 그 극복 운동이 좋다 혹은 멋있다고 여기는 감각과, 극복을 원하는 강렬한 욕구, 나아가 극복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려 드는 행위까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이 주체적 요인들의 변화 가운데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렇더라도 견고한 자본독재의 벽을 허무는 출발단계에서는 인식 혹은 사고방식의 변화가 비교적 효과적일 듯하다. 인식의 변화 없이는 감각이나 욕구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을 폭넓게 공유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고방식부터 공유해가는 것이 자본독재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에 특히 바람직한가? 아마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차별을 당연시한다면 자본독재를 거부할 이유도 별로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측면에서 같아지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아니라, 사회적 지배관계를 극복하자는 것이 평등의 요체다. 엥겔스는 평등 문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평등에 대한 현대적 요구는 봉건적 제약들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평등한 상업적 권리를 위한 것으로 등장하지만, 곧 계급철폐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로 발전한다. 엥겔스와 맑스는 계급철폐만 아니라 민족해방과 분업에 따른 차별의 극복도 추구했다. 평등은 그들의 실천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평등의 궁극적인 단계는 지배관계 자체가 사라진 사회다. 그 실현 가능성을 그들은 파리코뮌에서 확인했다. 그들은 파리코뮌이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의 주인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절대적으로 확실한 조치들을 취했다”고 강조한다. 모든 주요 공직을 위한 보통선거, 주민소환, 공직자의 특권 배제, 나아가 코뮌정부의 오류를 포함한 모든 정보의 공개, 서열체계 거부 등이 그러한 조치들이다. 파리코뮌의 정신을 현대사회에 살려내는 노동자민중의 민주국가를 통해서만 자본독재 권력의 폭주를 제어하고 지배관계가 사라진 평등사회로 도약해 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의 편협하고 딱딱한 위계적 사고방식⋅감각⋅욕망에 근거해 평등사회의 가능성을 철지난 망상으로 취급하는 자본독재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변증법적 사유의 비판적 혁명적 본성을 자유롭게 발현해야 할 것이다. 변증법을 ‘정-반-합’ 따위의 공식에 묶어놓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2023. 3. 20.)
※ 3회차 ~ 20회차 연재분은 위 순서, 링크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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