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가] 숙명의 굴레를 부수고 나아간 여성 혁명가 리쩐(李貞)


본문
이철의
리쩐은 중국 최초의 여장군이다. 그는 나중에 소장 계급을 받고 여러 개의 훈장을 받는 등 휘황한 조명을 받았지만, 그의 일생은 고난에 찬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리쩐은 막내였는데 부친은 그가 태어나고 다음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세상을 떠났다. 군벌들이 각축을 하던 전란의 시대, 과부가 자식 여섯을 데리고 살아갈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고씨라는 의원집에 민며느리로 딸을 보냈다. 그 시절 민며느리는 종이나 마찬가지였다. 온갖 학대와 욕설, 구타가 다반사였다. 열여섯이 되자 구식 혼례를 치르고 정식 며느리가 되었지만 리쩐은 여전히 학대와 구타를 당하며 살았다.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를 무너뜨리자 군벌들의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1926년 광둥에서 국공이 합작한 북벌군이 창사, 난창, 우한을 거쳐 난징 등으로 진격해 갔다. 리쩐이 살던 곳은 후난성 류양(瀏陽)이어서 북벌의 세례를 가장 먼저 받았다. 리쩐도 혁명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그는 각성한 여성들과 선전활동을 하고 군화를 만들었다. 리쩐은 류양의 부녀연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3월 리쩐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시댁은 리쩐에 연루될까 두려워 급히 이혼장을 써서 친정의 홀어머니에게 보냈다.
혁명활동 과정에서 리쩐은 중공 류양지구위원회 서기이던 장치룽(張啓龍)을 알게 되었다. 장치룽이 리쩐의 모친의 병을 돌보아 준 뒤 두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 그들은 서로의 활동을 지지하였고 1932년에 조직의 승인을 얻어 부부로 결합하게 되었다. 얼마 후 장치룽은 “개조파” ‘AB단 분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리쩐이 연루될 것을 걱정하여 통분을 무릅쓰고 이혼신청서를 당 보위국에 제출하였다. 리쩐은 이혼통지서를 받고 한바탕 통곡하였다. 그리고 보위국을 찾아가 두사람의 부부관계 유지를 호소하였다. 보위국은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리쩐은 원하지 않는 이혼을 당하게 되었다.
1927년 이래 리쩐은 유격대의 지도부가 되어 국민당군 및 지주 무장단과 투쟁했다. 신부로 위장하여 신행을 가는 척하다 고을의 지주들을 들이친 일도 있었다. 마오쩌둥이 추수봉기를 일으켰을 때 리쩐도 유격대를 이끌고 적극 호응했다. 한번은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리쩐은 일부를 별동대로 편성하여 국민당군을 유인하였다. 몰리고 몰린 별동대가 산위 절벽 막다른 길에 이르러 포로가 될 위험에 처하였다. 여성들이 체포되면 능욕을 당한 뒤 처형을 당하는 시절, 리쩐은 남은 동료들과 함께 절벽에서 투신하였다. 일곱명 중 세명이 나뭇가지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중상을 입은 리쩐은 천신만고 끝에 산야를 헤매어 유격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후 리쩐은 후난성과 장시성의 경계에 세워진 소비에트에 합류했다. 장정을 떠나게 되자 이들은 2방면군이 되었는데 허룽이 지휘책임을 맡고 있었다. 어느날 허룽은 간스치라는 간부를 불러 리쩐과 함께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간스치는 소련에서 유학한 엘리트 공산당원으로 허룽이 두사람 사이를 중매하려 한 것이었다. 남성이 대부분이고 여성이 극소수인 상황에서 두 사람은 곧 혼인하게 되었다. 그후 리쩐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하게 되었다. 행군과 전투, 기아 속에서 리쩐은 조산하였고 아이는 금방 사망하였다. 그후 리쩐은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후 리쩐은 옌안의 해방구에서 부녀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했다.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간스치와 리쩐은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야전군의 정치부 주임과 정치부 비서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둘은 중국 인민지원군에 참가하여 정치부 주임과 비서장으로 활약하였다.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에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간스치는 인민해방군 상장(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 리쩐은 소장(준장에 해당) 계급을 받았다. 1960년 간스치는 반혁명으로 실각한 펑더화이에 연루되었다. 군대내 직무를 박탈당한 그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1964년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쩐은 계속 인민해방군에 복무하여 방공군 간부부장등 요직을 맡았다.
자식이 없는 리쩐은 혁명 유자녀 20여명을 부양하였다. 그래서 늘 살림이 쪼들렸다. 군대 고위직에 있었지만 집은 낡았고 가구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집의 화장실이 새고 난방이 되지 않아 겨울에는 양털 담요를 둘러쓰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당에서 주는 복리비를 받지 않았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라는 권유도 뿌리쳤다. “명중에 산화한 열사들이 많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하다.”
1990년 3월 11일 리쩐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4개의 훈장 에 별다른 유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5년동안 사용한 등나무 의자와 40년간 사용한 군용 가방, 14년이 넘은 외문 냉장고, 인민폐 11,00위안, 국고채 2,00위안, 전쟁때에 받아둔 작은 골드바 뿐이었다. 리쩐은 유물에 대하여 이런 유촉을 남겼다. “골드바 한 개는 자신의 고향 류양현에, 다른 하나는 간스치의 고향인 닝샹현에 각각 기부하여 교육사업에 쓰게 하라. 예금의 반을 베이징 소년궁전에 나머지 반은 당비로 헌납하라.” 당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리쩐의 마음에는 오직 인민이 있을 뿐이고 자신은 없는 것 같았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