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가] 천겅(陳賡), 두 번이나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다


본문
이철의
천겅은 인민해방군이 자랑하는 상승장군이다. 난창기의, 장정, 항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천겅은 지략과 용맹함이 뛰어나고, 모략과 지하공작에도 능하여 마오쩌둥이 필요한데 쓸 수 있는 특급 조커와 같은 인물이었다.
천겅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재학 중 황푸 3걸로 꼽혔다. 천겅을 눈여겨 본 장제스는 그를 경호중대장으로 임명하여 신변에 두었다. 장제스가 군벌 천중밍과 싸울 때 사면포위를 당한 일이 있었다. 형세가 절망적이어서 장제스는 권총을 빼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때 천겅이 장제스를 부축하고 등에 업으며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광저우 상단의 반란 때 천겅은 또 한번 장제스를 구출하였다. 상단 두목이 칼을 빼어 장제스를 치려는 찰나 천겅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제압하였던 것이다. 장제스는 천겅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공산당에 입당하지 마라 젊었을 때는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데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천겅은 출세가 보장되는 장제스를 마다하였다. 오히려 난창기의를 일으키고 누구보다 투철한 투사가 되어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천겅(1903-1961) 후난성 샹샹현 출생. 무장집안 출신으로 조부가 후난군 장군이었다. 무산계급 혁명가, 군사가, 중국 인민해방군 대장, 국가와 중국인민해방군의 우수한 영도자, 신중국 국방과학기술, 교육사업의 기초를 닦은 사람(중국 공산당 홈페이지) 천겅은 192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소련에 유학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1927년 난창기의에 참가하였고 다음해부터 상하이에서 중공 중앙 특과에서 복무하였다. 특과는 비밀공작을 하는 임무로 정보수집, 요인 경호, 체포된 당원의 구출등 특수임무를 수행하였다. 1931년에는 홍군 4방면군 사단장으로 있다가 부상을 당해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쑹칭링(쑨원의 부인)등의 구명활동에 힘입어 위기를 넘겼다. 쑹칭링은 장제스에게 “그가 두 번이나 당신을 살렸지 않느냐? 그러니 죽이지 마라.”고 적극 권하였다. 장제스는 천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후중난, 두위밍등 동기들을 보내 설득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상하이를 탈출한 그는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로 갔다. 장정 때 천겅은 간부연대 연대장을 맡아 당 중앙의 요인들을 경호하였다. 그 후 그는 남정북전을 하며 일본군,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어디에서도 패하지 않는 상승장군이 되었다. 그는 1950년 쓰촨성 시창(西昌)에서 마지막 남은 후종난군을 격파하여 대륙을 통일하는데 마침표를 찍었다. 뿐만 아니라 윈난성에 남아 재기를 도모하던 국군 잔병을 완전히 소탕하였고 일부는 베트남으로 탈출하였다.
천겅은 1950년 베트남을 방문하여 프랑스와 투쟁중인 베트남군을 지지응원하였으며, 1951년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사령원이던 펑더화이가 신병으로 귀국하자 사령원 직무대리를 맡아 중국군을 지휘하였다. 1952년 7월 해방군 군사과학공정학원 원장에 취임하여 중국군 현대화를 도모했으며, 해방군 부총참모장, 국방부 부부장등으로 재직하였다. 1955년 대장계급을 받았으며 1961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연애편지를 벽에 붙인 천겅의 부인
천겅은 성격이 활달하고 직선적인데다 유머가 풍부하였다. 1926년, 공산당 5차 전국 대표대회 때 천겅은 참석한 왕건잉(王根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는 왕의 바로 옆자리에 앉더니 펜을 꺼내어 구애하는 편지를 썼다. “왕건잉 동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정중하게 구혼하니 나에게 시집오기 바랍니다.” 천겅은 옆에 있는 동지를 시켜 왕건잉에게 주었다. 왕건잉은 느닷없는 구애 방식에 화가 나 편지를 벽에 붙여 놓았다. 천겅은 다시 편지를 썼는데 왕은 마찬가지로 벽에 붙여 두었다. 천겅이 세 번째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는 읽지도 않고 벽에 붙였다.
휴회 시간에 참석자들은 모두 벽 위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되었다. 왕건잉은 1906년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9살의 나이에 방직공장의 아동 노동자가 되었다. 1923년 왕건잉은 중국 공산당 산하 조직이 개설한 노동자야학에 들어 혁명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음해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한 그는 1925년 반제애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투쟁 중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왕건잉은 상하이에서 세차례의 무장기의에 참가했으며 1927년에는 공산당 제 5차 대회에 상하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천겅과 혼인한 그는 중공 중앙 특과에서 천겅을 보좌했다. 1931년 천겅이 당의 명령으로 어이완(鄂豫皖: 후베이 후난 안후이 경계에 설립한 소비에트) 소비에트로 떠났을 때 왕은 상하이에 남았다. 그는 상하이 비밀공작 중 국민당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저우언라이 등 중공 중앙이 그를 구출 해냈다. 옌안으로 간 왕건잉은 당의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갔다. 팔로군 129사단 정치부 재정간부학교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던중 일본군의 기습때 전사하였다. 그때 그는 무사히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났으나 빼놓고 온 문건을 가지러 갔다가 적과 조우했다고 한다. 1939년 전사했을 때 왕건잉의 나이는 33세였다. 천겅과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5년 뒤 천겅은 팔로군 문선대원이던 푸야(傅涯)와 재혼하였다. 푸야의 기억에 따르면 천겅은 구혼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첫째, 나는 당신의 혁명사업에 대한 신념을 존중할 것이며 진보하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나는 당신이 내 주변에서 비서로 일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천겅대장’이라는 연속극에 보면 푸야는 천겅에게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발을 닦아야 한다.” 위의 세가지는 기록에 있는 사실이고 아래는 재미로 덧붙였을 것이다. 신중국 성립 후 푸야는 베이징시에서 일했다. 그녀는 왕건잉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이들과 똑같이 키웠다. 왕건잉의 일기를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홀로 남은 왕의 모친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고 한다.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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