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문화의 정체와 성격(4) - 직접생산자로서의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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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욱 (노동예술단 선언)
아버지에 대한 심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고통’이다. 끙끙 앓는 소리, 고통에 신음하던 소리를 들으며 무서워하기도, 안쓰러워 울기도 하면서 잠든 날이 많았다. 그다음은 술에 취한 모습. 아파서 술을 그렇게나 드셨는지 술을 그렇게나 드셔서 아팠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좋은 모습은 아니다. 너무 박한가 싶어 긍정적인 단어를 열심히 떠올려 보지만 아쉽게도 결과가 바뀌진 않는다. 해서 내게 아버지는 그리 멋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멋있었던 적이 있다.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는 시내버스 운전을 하셨다. 우연히 처음으로 아버지가 운전하던 버스를 타게 된 날.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선 후 문이 열리자,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순간 홀린 듯, 차에 탈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켜봤다. 버스 유리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선글라스. 하얀 장갑 낀 손을 커다랗고 까만 핸들 위에 멋들어지게 올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운전석에 앉아 나를 보던 표정. 어디에도 내가 알던 술 냄새와 고통에 찌든 모습은 없었다. 아니 내가 알던 어떤 영화배우보다 멋있어 보였다. 마치 엄청난 예술작품을 마주 했을 때 느끼는 스땅달 증후군 같은 강렬한 경험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노동자 문화의 정체성과 성격에 대한 글인데 뜬금없이 아버지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내가 처음 본 노동자는 아버지이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멋진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모습이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고개를 아무리 쳐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던 높은 건물들, 쇳덩어리들이 큰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고 바다를 가르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디든 나를 데려다 놓고…. 그 모든 경이로움 속엔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중장비를 움직여 돌을 깨고 옮기던 것도 사람이었고 아득한 건물을 꼭대기까지 지어 올리던 것도 사람이었다. 그 모든 이들이 내겐 그날의 아버지처럼 마치 슈퍼히어로 같이 느껴졌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좀 더 철이 들고 나서야 그들을 노동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모든 경이로운 현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들을 자본가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지난 글에서 노동자의 집단적 정체성을 피지배계급으로서의 계급성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 만물을 일구어내는 떳떳한 노동자(노동자의 길)’라는 노랫말이 말해주듯 말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 즉, ‘직접생산자’라는 정체성이다. 따라서 노동자 문화의 성격 역시 그러한 정체성에서 비롯되어 형성된다.
다시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인간이 생존과 생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벌이는 목적의식적 활동. 더 풍족한 식량을 얻고 싶다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활동이 신석기 혁명을 거쳐 농경을 정착시키고 생산력을 발전시켜왔듯, 내가 느낀 수많은 경이로움은 노동의 결과물이었다. 해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첫 번째로 주저 없이 ‘노동’이라 말한다. 지금 사회에서 그 노동의 담당자들이 바로 노동자이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노동자 문화의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럼 당최 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뭐냐는 건데…
내손으로 처음 누군가를 위한 밥상을 차려 본 날의 기억이 있으신지? 늘 차려준 밥상에 앉아 먹기만 하던 나는 그 때 비로소 음식의 의미를 알았다. 자신의 손으로 생산하는 이들은 생산의 소중함을 체득한다. 그리고 그 날, 내 입으로 먹을 것이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역시 알게 됐다. 생산의 소중함을 인식하면 생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도 인식하게 된다. 노동은 사회적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늘 등장하는 구호가 ‘적정인력 충원하라!’이듯, 노동하는 이들은 혼자선 할 수 없다는 것, 서로 힘을 합치고 돕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득한다. 자연스럽게 협력과 연대라는 문화가 형성되고 그것은 평등의식으로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 즉,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지 않고 착취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그 문화 역시 반대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현장을 점거하거나 파업을 하면 자본가들은 공권력 투입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명분은 대체로 ‘시설물 보호’이다. 실제로 공장점거 투쟁을 하던 한 현장에서 같은 일이 있었는데 시설물을 파괴하는 자들은 시설물 보호를 명분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이었고, 그들로부터 시설물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던 것은 공장점거투쟁을 하던 노동자들이었다. 당연하겠지. 공장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자본가들이 그 기계에 자기 손 때 한번 묻혀 봤겠나? 노동자에겐 삶의 터전인 그곳이 자본가들에겐 단지 장부상에 기록된 숫자일 뿐일 테니.
자본가와 고위 권력자들, 혹은 그 가족들의 퇴폐행각과 마약사건 관련 보도가 끊이지 않는 것은 단지 그들이 돈과 권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노동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 이들은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퇴폐와 향락의 문화이고 무한 이윤추구 욕구와 그를 위해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문화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있으실 거다. 실제로 노동 현장의 문화는 인간다움의 실현이니 생산적이니 연대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맞다. 지금의 노동은 앞에서 말한 본래적 의미의 노동과는 거리가 멀다. 검색만 해봐도 노동을 ‘생산의 요소’니 ‘보수를 대가로 하는 인간의 활동’이니 하는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생활이상의 실현이니 목적의식이니 하는 것들은 택도 없고 그저 먹고 살아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파는 단순한 노동의 반복이다. 그 마저도 대부분은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만들어주는 착취의 과정일 뿐인 소외된 노동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복직투쟁을 하던 한 해고노동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동지는 공장에서 입던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용접을 하다보면 불똥이 튀어 옷에 구멍이 나기도 하고 일에 집중하느라 그 불똥이 살을 파고 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거다.
물었다. “그런 현장인데도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게요, 현장에서 일할 때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작업복을 다시 입고 그렇게 출근하고 싶네요… 허허…”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그날 현장에서 일했던 자신의 얘기를 할 때만큼 생기 돌던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기타를 만들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새로 장만한 기타를 들고 간 날.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냉큼 내 기타를 열어보고 기타 얘기에 열 올리던 동지들. 내가 기타의 주인이었지만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 부품은 뭐고 목재는 뭐를 썼고 등등 결론적으로 좋은 기타’라는 얘기를 하던 그 동지들의 표정이 너무 밝고 활기차서 한참을 그냥 듣고만 있었더랬다. 현장 몸짓패 강습을 하다보면 가끔 그 동지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날 노동자로서의 아버지를 처음 봤던 기억이 소환된다. ‘강습 때 서툰 몸짓을 하며 진땀을 흘리던 이들이 맞나?’ 싶게 전혀 딴판인 멋진 모습이다. 요즘 말로 ‘본캐’의 힘이라고 할까…. 여전히 경이롭다.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 투쟁을 하는 이유는 단지 경제적 회복을 위해서만은 아닐 거다. 아무리 척박한 자본주의의 소외된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노동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압도하진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역이다. 누군가는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누가 노동하려 하겠냐고 한다. 단언컨대 쓸데없는 걱정이시다. 이렇게 소외된 노동임에도 그렇게나 그리워하는데 착취가 없어진 사회에서의 노동은 오죽하겠는가?
해서 여전히 노동자의 문화는 직접생산자로서만이 가질 수 있는 생산의 문화이고 창조와 발전의 문화이고 평등과 연대 공생의 문화이다. 다만 거대한 지배이데올로기의 힘이 애써 가리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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