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들의 집회 문화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적 대중문화와 광장의 정치


본문
최종우 (대학생)
2010년대부터 한국 대중문화의 영역이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한국의 부르주아 언론과 국가권력은 한국 문화의 영향력을 자랑스레 선전해 왔다. 한국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영향력을 문화적인 형태로 타국 근로대중에 투사할 수 있게 된 것을 자축하고 있는 꼴이다.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체제 속 문화산업의 산물이다. 이 쟁점은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에 대해 개인이 호의적 또는 비호의적으로 비평하는가의 문제와 별개의 쟁점이다. 인간 개개인에게 아무리 선한 영향을 가져다줄지언정,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체제 속 문화산업의 산물이다.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는 더욱 그러하다. 연예기획사들은 수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론칭’하며 자신들의 자본 증식을 위해 혼신을 기울여 만들어낸 새로운 춤, 곡, 가사, 그리고 ‘스타'들을 선보인다. ‘론칭’이 성공하면 온갖 음반과 ‘굿즈(연예인과 관련되어 팔리는 온갖 잡화를 칭하는 용어. 책, 화보, 기념품, 가공식품, 응원봉 또는 다양한 생필품 등)’를 판매하여 큰 수익을 벌어들인다.
그런데 작년 12월부터 이러한 ‘굿즈’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응원봉이 거리에 흘러나와 집회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음향기구를 단 트럭에서는 온갖 최신 대중음악이 흘러나와 응원봉을 든 청년 학생들을 기쁘게 한다. 마냥 호의적으로 조망하기 힘든 광경이다. 현재의 탄핵인용(파면) 촉구 집회를 주도하는 ‘비상행동’ 등의 단체들이 그러한 최신 음악을 틀 때마다 저작권료가 연예기획사들의 호주머니로 흘러가는 건 아닐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려되는 것은 본래 ‘굿즈’의 일환으로써 아이돌 콘서트장에서나 팔리던 응원봉들이 투쟁 현장으로 흘러나왔다는 것, 최신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가 본래 민중가요가 흐르던 대형 스피커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현상 자체이다. 이는 가볍지 않은 문제점을 함의한다. 집회현장이 집회에 참석한 젊은이들이 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진중히 고민하고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라는 달콤한 이데올로기와 쓰디쓴 현실의 경제적 고통 사이의 간격을 스스로 숙고하게끔 추동하지 않는다는 방증인 까닭에서이다.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러 현장, 사업장, 농성장에서의 목소리가 우선으로 집회 연단에 오르는 대신 젊은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집회 연단에 오른다. 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집회에 참석하여 무엇을 느꼈는지를 고백한다. 각자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현장으로부터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고 위로받았다는 언사부터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면서도 집회 참여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다는 지방 대학생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이들 발언의 끝은 희망찬 투쟁 격려와 함께 매한가지의 내용으로 종결된다. ‘윤석열 몰아내자’라는 추상적 결론이 매번 반복된다. 마치 저놈만 몰아내면 발언자 본인들을 비롯한 이 사회가 진전되는 양, 비약적 구호가 쏟아져나온다.
청년들이 이토록 갈팡질팡하며 집회를 ‘즐기는’ 동안, 탄핵 국면 이후의 정국에서 청년들을 포함한 근로대중을 위하는 투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조차 집회 현장에서 제시되는 것 같지 않다. 요즈음 많은 이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소위 ‘사회대개혁'을 보라. 이 ‘사회대개혁’이 내놓는 요구사항조차 매우 추상적이어서 이 사회의 노동자계급에 피부로 와닿지 않을뿐더러, 어떻게 이를 구현해 내겠다는 방법 또한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에 아부해서 구현할 것인가? 아니면 총파업 투쟁으로? 그 추상적인 내용에 대해서 각설해 보더라도, 앞으로의 정세 속에 그 내용을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 여러 시민단체나 민주노총 양경수 지도부 등이 백날천날 ‘사회대개혁 완수’를 운운하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는 하청, 용역, 이주민,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함은 간간이 들릴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전방위적으로 고통받는 이야기들이 집회 현장에서조차 소외되고 있다.
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중에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집회 현장은 청년들 자신의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이 아니었으면 한다. 집회 현장은 늘 도심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가장 엄숙한 장소이다. 현실의 무거움을 연단에서 발언을 듣고, 투쟁현장 활동가들이 벌이는 서명운동 간이테이블에 멈춰서 사정을 접하고, 여러 조직마다 나눠주는 대자보와 문건을 받으며, 기성 언론으로부터 찾아볼 수 없는 관점으로 정세를 읽는다.
집회 현장은 이제 막 사회문제에 눈 뜨기 시작한 청년들에게 교육의 장소였다. 자신의 느낌과 당위를 현실의 객관적인 엄혹함보다 앞세울 수 없는 곳, 타인들의 요구사항에 먼저 귀 기울이게 되는 곳이었다. 집회 현장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축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관념적 구호로써 뭉개버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 하나의 믿음과 도덕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처한 아픔의 객관적 구조를 어렴풋이나마 탐색하는 곳이었다. 학생들에게 집회 현장이란 대학 강의실 너머에 존재하는 더욱 거대한 강의실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집회 현장은 청년들의 축제장이 되어버렸다. 매일 1.6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이 어두운 사회의 집회 현장이 말이다. 지금 이 시국의 거리에서는 대중들이 끝없이 억압당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조리 들추고 청년들에게 공통된 억압의 분모를 가르쳐주는 대신, ‘시민'들의 주의주의에 기대어 저마다 탄핵 너머를 전망하지 못하고 웃고 떠들다가 기분 좋게 귀가하는 집회 문화가 우리 시대의 ‘뉴 노멀'이 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는 연대가 덩그러니 거리에 버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쿠데타 시도 이후 한창 탄핵을 촉구하던 집회가 서울 전역에서 일어나던 12월 중순, 집회 현장에 같이 앉아 있던 친구들 몇몇이 잡담하다가 아이돌 연예기획사에 대한 논의를 접했다. 모 아이돌 음악그룹에 대한 소속 연예기획사와 프로듀서의 갈등, 사측의 부당한 처사를 성토하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그때 그 친구들은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벌써 두 달 하고도 보름 넘게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 그 아이들이 왜 응원봉을 들고 집회 현장에 나섰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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