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정당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대안인가? (오세중)


본문
오세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대선 시기로 접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여야 정당뿐 만 아니라 진보정당을 비롯한 노동, 시민 단체들이 대선 시기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노동, 시민 단체들 사이에는 진보정당들이 통합하여 한명의 대선 후보를 내야한다는 주장과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그리고 총파업 등 대중 투쟁을 더욱 확대해야한다는 주장 등이 나오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 시점에서 ‘과연 지금의 의회, 정당 정치가 노동자계급의 대안인가?’라는 자문을 해보아야 한다.
1.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과 정치
일반적 의미로 ‘정당’이란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결집체이다. 정당은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다른 이익단체, 정치단체, NGO들과는 구별된다. 정당이 국가적 의의가 있는 중요한 공공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정당은 국가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회에 기초를 두는 정치세력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결사와 동일하게 사적 성격을 띤다. 정당은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시켜 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민주정치의 도구로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금의 정당정치는 지배계급이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를 설득하여 민의를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득표조직에 불과하다.
현재의 ‘대중정당’이라고 불리는 정당 또한 유권자가 자유로이 참가하여 당원 대중의 민주적 의사로써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소수의 직업정치가의 집단이 당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단체이다. 따라서 사회적 요구를 발언하기 위한 조직 보다 정권 쟁취의 목적이 주된 정당 체제는 민주주의를 과두정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즉, 정당을 정책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단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대중정당’은 당내 민주주의의 원리를 당 체제로서 내세우고 있으므로, 당원 대중의 의사가 당 지도부에 미치는 영향은 조직면에서 상당히 강하다. 즉 원리적으로는 당대회-집행부-당대표의 순서로 당원 대중의 상향적 의사에 의해 민주적인 당 운영이 보장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당내 민주주의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란 정당이 투쟁 단체적 성격 때문에 신속한 의사결정의 능력과 군대적 규율을 가진 계층적-통일적 조직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과 방대한 수의 당원과 막대한 당 재정과 정치의 복잡화 및 전문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당사무국 관료의 발언권이 증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당 관료를 구사하는 실력을 가진 소수 간부의 수중에 당의 실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당원은 무력함과 무관심 속에 빠지는데, 이것이 또 소수자의 독재가 나타나는 작용을 한다.
근대 이전 대부분 국가의 정치는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근대 이전의 정치 파벌이나 정치적 비밀결사들은 대부분 귀족, 엘리트들이나 정치인들만의 조직이었다. 즉, 정치인과 관계없는 일반 백성이 그러한 정치 파벌의 소속원이 되거나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근대적 정당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당비를 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는 것이 가능하며, 당원이 되지 않더라도 투표를 통해 일반 대중들이 공식적으로 어떤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표를 주는 일반 시민인 지지자들이 정당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2. 정당 정치의 역사
서구의 정치사에서는 근대정당의 성립과 발전을 대체로 19세기 초부터 잡고 있으며, 의회정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는 나라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당정치의 전통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다. 근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정당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일의 정치적 주체에 대하여 처음에는 신흥 세력이었던 자본가들이, 그리고 뒤이어서 노동자들의 참여로 정치는 복잡한 투쟁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투쟁의 첫 단계에서는 주로 폭력이 승패를 결정지었으나, 이러한 방식은 결국 어느 쪽도 궁극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타협’과 ‘선의의 경쟁’이 룰(rule)이 되었고, 이에 정당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대중정당이 발전하게 되었다.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와 더불어 발전해 온 조직이다. 영국의 경우 정당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의회가 발달하였으므로 의회 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이 생겨났다. 한편 근대적 정당은 ‘민주주의, 대중의 선거권,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필연성, 통일적 최고 지도와 엄격한 당규율의 발전’(막스 베버)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정당이 성립된 것은 미국에서는 1840년경, 영국에서는 1867년 이후였다. 오늘날과 같이 치밀하고도 방대한 정당조직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보통선거제가 실현되어 성인이면 ‘누구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여러 대중정당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노동자들도 대중적 노동자정당을 건설하였으며, 이 정당들은 그 이후 수십 년간 노동운동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 소련의 공산당 등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사민주의 정당에 대한 지지는 떨어지게 되었으며, 소련 공산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50년대 명망가 정당의 수준에서 1960년대 최초의 근대정당으로서 민주공화당을 시작으로 민주화 이후에는 주요 정당들이 모두 대중정당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그 이후 1996~1997년 노동법개정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2000년 민주노동당이 건설되었으며, 2004년 17대 총선거에서는 10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당선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서로 자신들이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이라고 주장하면서 분열되었고,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참고) 각 나라별 정당 설립 요건
- 대한민국(인구 5,000만)은 5개 이상의 광역자치단체에서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을 필요로 한다.
- 영국(인구 6,500만)에서는 전국단위 정당을 만들려면 당원 1,000명 이상이 있어야 하고, 지역단위 정당을 만들려면 당원 수 200명 이상이면 가능하다.
- 미국(인구 3억 3천만)은 워싱턴 D.C.에 중앙당 등록을 하고 최소 1개 주에서 500명 이상의 당원을 모으면 정당 설립이 보장된다.
- 일본(인구 1억 2,300만)은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면 정치단체를 만들 수 있으나, 이 정치단체가 정당으로 인정받으려면 전국단위에서는 국회의원 5석(중의원, 참의원 합산)이나 가까운 전국단위 선거에서 전국 정당득표율 2% 이상을 기록했어야 한다.
- 홍콩(인구 740만)은 최소 당원 수 2명이다. 홍콩은 물리적 정당 사무실도 필요가 없다. 인구 740만 홍콩에서 활동 중인 정당 수가 250개에 달한다.
- 인도(인구 13억 8천만 명)는 정당 설립에 필요한 최소 당원 수가 100명이다. 대신에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으려면 인도 국회나 인도 지방의회에 당선자가 있어야 한다. 인도는 등록되어서 활동하는 정당 수가 2,700개에 달한다.
3. 노동자 민중의 대의기구를 건설하자!
지금의 의회제도, 정당정치는 자본가계급이 자신들의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지금의 의회는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적 요구가 중심이 된다. 지역 명망가, 또는 전국적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 당선되기 쉽다. 또한 선거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대개는 이것이 결정적이다. 결국 자본가 및 기득권 세력이 의원에 선출되는 구조이다. 그러나 의회는 형식적으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조직이고, 그렇기에 노동자 대중은 ‘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소수 지배계급의 도구인 ‘의회’가 아닌 새로운 노동자 민중의 대의기구는 1871년 프랑스 ‘파리 코뮌’에서 처음 나타났다. 파리코뮌은 자코뱅파, 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파리 코뮌’은 입법과 행정 기능을 수행했으며, 보통선거와 소환제, 특권 폐지 등을 실현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러시아혁명의 과정에서 ‘소비에트(평의회)’라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대의기구가 출현하였다. 소비에트는 선거구를 지역 중심이 아닌 공장 등 각 계급, 계층 단위로 선출하였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숫자에 비례해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되었으며, 따라서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였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하였으며,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다양한 정당의 소속인 경우도 있고, 정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민주노총의 대의원제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러한 대의원 선출 과정에서는 지금의 의회 선거처럼 ‘정당’이라는 조직과 막대한 선거비용이 필요 없다. 현재의 의회선거는 거대한 조직력과 자금력이 있는 정당을 통해서만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본자계급과 그들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이다.
이러한 대의기구는 당연히 노동자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다수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여 강압적으로 다른 계급 계층에 굴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농민, 도시빈민,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등에 대한 의석 할당을 통해 소수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4. 노동자계급 정당에 대하여
노동자계급 정당은 기존의 자본가계급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활동하는 정당과는 다르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기존 자본가들의 정당과 ‘경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정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 정당의 역할은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계급적 단결을 확대, 강화하도록 하는 것이며, 투쟁 속에서 건설된 대중적-민주적 투쟁기구가 ‘자본가 국가를 분쇄’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통해 계급의 소멸, 국가의 소멸,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평등과 노동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 결사체’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일국적 관점이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해를 위해 투쟁하며,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 정당은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조직이며, 이론적인 면에서는 계급 운동의 진행과정, 조건, 궁극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자본가들에게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급적 차이는 사라지고, 국가는 정치적 성격을 잃고 단순한 행정적 기능으로 전화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와의 투쟁에서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이 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면,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체제와 함께 계급 적대와 계급의 존재조건 자체를 철폐하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노동자계급이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력, 정당이란 본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계급 적대의 물적 토대를 제거한다면 계급은 소멸될 것이며, ‘정치 결사체’로서의 노동자계급 정당 또한 ‘소멸’될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자계급 정당은 당 규율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권력 획득’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발적인 헌신으로 민주집중제를 실현하는 ‘정치결사체’이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혁명 과정에서 혁명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조직이며, 국가권력은 노동자계급의 대중 조직이 장악한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단지 그러한 대중조직 속에서 다수의 영향력을 획득하고, 노동자대중이 노동해방 세상을 건설할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어가는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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